제목 내 위대한 보통 친구
글쓴이 홍종운 날짜 2015-11-26 조회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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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대한 보통친구: 내 논문을 갈무리하기 위해 마음이 바쁘지만 이 글은 더 미룰 수 없다. 내 초등학교 동창생 한 분이 며칠 전 작고했다는 소식을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야 들었다. 송구한 마음 이를 길 없다. 그를 생각하는 글이라도 적으면서 그를 추모(追慕)하려한다.

그와 내가 함께 다녔던 초등학교는 충남연기군남면연기리에 있는 연남초등학교다. 재작년에 개교 100 주년을 맞은 유서(遺緖)깊은 학교다. 세종시가 그 학교 근처에 들어서면서 자칫하면 폐교될 수도 있었다. 다행이 그건 모면했다. 인근에 있었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던 우리 하교와 라이벌이었던 한 초등학교는 폐교됐다.

그 때 우리학교는 근방(近方)에 학교가 없던 때라 멀게는 8 km를 넘는 데에서도 통학을 했다. 나는 4 km를 통학했다. 나는 그 때 그게 그리 힘든 줄 몰랐다. 겨울 동안에는 하도 추워서 더러 언 발 등에 오줌을 눟어보기는 했지만 학교길이 고역스럽다고 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하교길이 예습과 복습의 기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 9 단이란 걸 혼자 터득한 것도 그 길에서 였고,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기미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신 33 분들의 이름을 다 외운 것도 그 길이에서 였다. 아마 그 때 학교에서 원소주기율표를 가르쳤다면 그것도 다 외웠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외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선대의 묘소라던가 족보(族譜) 같은 것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그걸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6 년 간 오고간 학교길에서 그걸 다 와웠을지도 모른다. 그 때 양반 집에는 보학(譜學) 잘하는 이가 한 두분은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게 베토벤의 월광소나타의 1 악장 쯤 될거다. 사람들에게 지루할 테니.)

각설(却說)하고... 며친 전에 작고(作故)한 내 친구는 보통리(洑通里) 동내 이름을 가진 곳에서 살았다. 학교로부터 한 2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았으니 하교에 오가는 길이 멀어서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게다. 동내이름처럼 그 동내는 보통(普通) 동내였다. 며칠 전에 작고한 내 친구도 보통리에 사는 보통 학생이었다. 키도 보통, 운동도 보통, 학과성적도 보통, 예능도 보통인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때부터 그 친구를 기억하고 있었고 보통 정도로 친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집에 가보거나 그의 아버님과 어머님께 인사도 드려보지 않았다. 그냥 친했다. 그야말로 보통리에 사는 보통 친구였다.

몇해 전 동창 모임 때 산길을 산책하며 그 보통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업인 농사를 이어가라고 하셨단다. 그의 아버님께서...그는 그 뜻을 따랐고 열심히 일했단다. 그러다가 군에 입대했단다. 논산에서 기본 훈련이 끝나자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광주에 있는 포병학교에 배치되어, 두 달 동안인가 교육을 받았단다. 그 때 주말마다 외출을 다녀오라 했는데 주머니에 돈도 없었고 광주에 아는 이도 없어서 부득이 기차로 갈 수 있는 조치원에서 8 km 덜어진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단다. (외출증을 가진 군인에게는 기차가 무료여서) 그러데 그 때 왜 포병학교 뿐 아니라 모든 후방의 군부대들은 주말마다 대원들에게 외출을 가라했는가? 대원들의 휴식을 위해서? 아니었다. 부대의 군량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는 토요일 이른 오후에 부대를 떠나는 즉시 광주역으로 달려갔다. 그때는 별로 자주 다니지도 않았고 서서 다니기 일쑤였던 호남선 기차를 타고 조치원 역에 도착하면 새벽 2 시였다. 그 시간에 8 km를 실어다 줄 교통수단이 없었다. 자신의 두 발 밖에는.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새벽 4시였다. 세수하고, 무엇 좀 먹고 자리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귀대(歸隊) 길에 올라야 할 시각이 됐다. 그 시각에 집에서 떠나야 8 km를 걸어서 조치원역에 도착해서 광주행 호남선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그래야 귀대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포병부대에서 교육를 보통 성적으로 마친 그는 전방 최 일선에 배치됐다. 부대장이 “무얼 제일 자신 있게 할 수 있나?”고 물어서 밥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더니 취사병(炊事兵)을 하라고 해서 열심히 일 했단다. 없는 쌀로 밥 짖기는 어려워도 있는 쌀로 밥을 짖는 거니 어렵지 않더라고... 그래도 밥만 지은 건 아녔어... 군대인데... 대포는 아니고 기관포를 잘 쏴서 특등사수가 되기도 했지... 내가 누구여? 보통리에 사는 보통 사람은 되잖여?

제대를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섭섭지 않을 만큼 낳고 기르고 가르쳤지. 모두 5 남매인데 다 대학까지 보내고 큰 아이는 경찰관인데 얼마 전에 총경인가가 됐다는데 그게 무어 하는 건지 몰라도 내 속 썩이지 않으니 다행이고...다들 제 몫은 하나봐...친손(親孫), 외손(外孫) 다 합해서 15 명이야.... 젊었을 때, 애들 공부시키느라고 마누라는 허리 펼 날이 없었고, 나는 거의 매일 가락동 농산물 시장을 밤 바구니에 쥐 드나들 덧 했지. 이제는 그렇게는 안햐. 그래도 두 내우(내외) 먹고는 살고 아들딸과 손자손녀 애들에게 신선한 먹을거리 보내줄 수는 있으니...

이 위대한 보통리에 살던 보통 사람이 작고했단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다.

내 친구는 나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모로....나는 아들과 딸을 합해서 3 명뿐인데 그는 5 명을 두었고, 나는 친손과 외손을 합해서 4 명뿐인데 그는 15 명을 두었다. 4대 15, 이건 게임도 되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나 나이 든 때나 국민들이 먹을 푸성귀 한 잎도 시장에 공급한 바도 없다. 나는 아직도 나랏돈을 축내가며 사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러지 않았다. 나랏돈을 보태기는 했어도. 그는 빚지지 않은 처지에서 안면(安眠)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송구스럽다. 그동안 나라와 나라 안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지은 바를 다 갚지 못하고 마지막 날을 맞게 될까봐....
그는 위대한 보통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도... 어렸을 때 국민 소득 78 달러에 불과했던 나라의 국민소득을 죽을 때에는 30000달러인 나라로 만드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 사람이니...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런 국민들 없다. 이 나라 빼고는... 그런 내 보통리의 위대한 보통 사람, 그를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