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안면도와 대동여지도
글쓴이 홍종운 날짜 2015-08-24 조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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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번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두 손녀들과 함께 우리 내외가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라지만 1 박 2일 여정이었다. 그래도 얻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않았다. 우리는 지난 21 일 오전 10 시 30 분쯤에 차 두 대로 수원 권선구 곡반정 동을 떠났다. 비봉 쪽에서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차 한 잔 들고, 유유히 갔는데도 안면도의 한 항구에서 점심을 먹을 정도의 시각에 안면도에 도착했다.

차창 밖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이 고장은 마늘과 고추가 유명한데 마늘은 이미 수확해서 농산물 점포들에 가득했고 고추는 밭에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기후가 건조해 그랬는지 병에 걸린 고추밭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비닐멀칭을 잘해서 병균의 이동이 차단돼서 그랬을 것 같다. 논의 벼들은 짙푸르게, 실하게 자라고 있었고 이미 이삭이 나온 논도 드물지 않았다. 벼가 익을 때 태풍이 지나가지만 않는다면 미상불(未嘗不) 올 벼농사는 풍작일 것 같다.

모든 산은 짙푸르고... 부국(富國)의 징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심은 나무 수 보다 입산금지라고 쓰인 팻말을 수가 더 많았고 땔 감을 얻느라고 죽은 나무뿌리(그걸 우리 고향에서는 “고주배기”라고 불렀다)까지 캐오기기까지 했다. 환경파괴적인 행위의 극치였다. 그 때는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고 잠잘 때 냉방에서 자는 건 자는 게 아니었으니 무슨 짓인들 꺼렸겠는가?

지금은 우리나라 산은 어디에 가나 짙푸르다. 그 동안 국민의 환경보전 의식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져서 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멀쩡한 음식을 남겨 쓰레기로 버리는 걸 다반사(茶飯事)로 해서 그걸 처치하는 데에 한 해에 몇 조원씩 쓰는 판국인데...
그동안 우라나라 산이 산다워진 건 농토에 비료 잘 준 덕이고 (비료가 있으니 산에 가서 플을 베어다가 퇴비 만들지 않아도 되니), 집 짓는 데에 목재(木材) 안 쓰고 난방(暖房)과 취사(炊事)에 나무 안 써서 산이 푸르러진 건데....

안면도에 도착하면서 우리의 위대한 실학자(實學者)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생각났다. 그분이 해가 질 무렵에 짚신을 여러 켤레 메고 안면에 도착했다면 그는 그날 밤을 어떤 집에서 지냈을까? 끼니는 어떻게 때웠을까? 그 때에는 그가 하던 일로는 동전 한 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의 가문은 큰 부자도 아니었는데 왜 그는 그 힘든 일을 자청했을까? 놀랍고 놀랍다.

세상을 위해 올바른 지도를 만들어 세상에 이로움을 끼치자는 정신 그게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 아닐까? 우리나라에 그런 분들이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런 전통 때문에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 아닌가. 대동여지도 말고 청구도(靑丘圖)라는 지도도 만들었었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했단다. 그는 중인(中人) 출신이라 크게 인정도 못 받았단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요즘에는 반상(班常)이란 게 없으니 반상을 따질 필요는 없을 테고.. 나는 무얼 위해 살아 왔고 앞으로 그리 길지 않은 날들 동안 무얼 했다고 사람들이 말할까?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림 솜씨가 없어서 우리나라 지도를 그릴 때 태안반도를 그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나는 이미 있는 지도를 보면서 자도를 그리는 것 조차 어려웠는데 어떤 고장의 높은 데에 올라가 지형을 목측(目測)으로 스케치(Sketch)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거기에 장단(長短). 고저(高低), 역사까지 담는 일을 혼자서 한다는 건 신의 솜씨가 아니고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텐데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했을까?

빛나는 그 이름 고산자 김정호!